EASY - CRAZY - HOT의 3부작을 마친 르세라핌의 행보가 궁금했습니다. 특히 CRAZY가 대중들에게는 다소 난해하다고 느껴졌을지 몰라도 해외 스포티파이 차트에서 꽤나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저는 이 앨범을 기점으로 르세라핌이 컨셉추얼한 시도를 하더라도 컨셉에 잡아먹히는 것이 아닌, 컨셉을 온전히 소화해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대로 미친 듯이 컨셉추얼한 걸 들고 와라! 라고 해서 나온 것이 스파게티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강렬한 컨셉 그 자체를 들고 왔습니다. 공식 설명을 들어보면 이빨 사이에 낀 스파게티처럼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는 의미로 만든 곡이라고 합니다. Eat-it-up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코러스가 마치 이빨 사이에 낀 것처럼 묘하게 난해함과 불편함을 주는데 중독적이어서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보면, 원하는 컨셉을 완벽하게 달성한 것 같습니다. 컨셉 자체가 난해하다는 생각은 들어도, 르세라핌이 이를 소화하는 과정에서의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령 컨셉이 진짜 안 어울리는데 차라리 다른 그룹이나 팝가수가 했으면 어땠을까, 와 같은 생각이 드는 그룹과 노래들이 존재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소화력에 또 한 번 감탄합니다.하이브의 걸그룹인 만큼 제이홉이 피처링에 참여했는데, 제이홉의 솔로곡 Chicken Noodle Soup도 SPAGHETTI와 같은 강렬하고 개성 있는 컨셉의 노래이기에 피처링을 찰떡같이 잘 고른 것 같습니다. 마침 우연히 둘 다 음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신기하네요.
아무래도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어지다 보니, 사람에 따라 SPAGHETTI와 같은 강렬한 컨셉이 감당하기에 너무 버겨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저도 르세라핌의 과감한 시도와 컨셉 소화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토하는 시늉을 내는 소리 때문인지 노동요를 찾을 때를 제외하면 자발적으로 평소에 노래를 찾아 듣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르세라핌은 늘 베이스나 신스 사운드가 느낌 있게 깔린 수록곡들을 들고 오니 그걸 들으면 됩니다. 2번 수록곡 Pearlies (My oyster is the world)가 이런 곡인데, 경쾌한 기타 리프가 있는 디스코팝 장르의 곡입니다. 마치 바람이 선선해진 가을 새벽에 창문을 열고 달리며 듣고 싶은 그런 노래입니다.
또한 허윤진이 디렉팅에 제법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도 타이틀곡 SPAGHETTI와 Pearlies 모두에 참여했습니다. 자작곡 I ≠ DOLL이나 Raise y_our glass 등을 들어보면 확실히 자신의 메세지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능력은 충분히 검증된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의 하나의 온전한 컨셉을 구성할 수도 있을지 앞으로의 미래가 많은 기대가 됩니다.
미야오 - BURNING UP
미야오의 첫 EP “MY EYES OPEN WIDE”를 인상 깊게 들었던 사람으로써, 미야오의 다음 행보가 다소 기대가 되었습니다. 가원, 수인을 중심으로 한 저음의 매력적인 보컬이 특징이고, 안나라는 뛰어난 비주얼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멤버들 다섯 명이 다 고급스럽게 예쁘고 매력 있다고 생각해서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그룹 중 하나입니다.
Burning Up도 이 저음의 보컬을 잘 활용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데뷔곡 MEOVV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미야오의 팀 컬러는 미니멀한 비트에 저음의 소울풀한 보컬, 그 미니멀리즘에서 오는 고급스러움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최근 유행하고 있는 져지 클럽 장르를 차용해서 미니멀한 느낌을 유지하되 피아노와 신스 소리로 공백을 채웠습니다. 역시나 미야오에 딱 맞는 노래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고, 안무도 팔다리를 쭉 뻗는 안무가 많아서 평균 키 168에 키 170 이상의 멤버를 두 명이나 보유했다는 강점을 잘 살렸습니다. 괜히 테디의 딸들이 아니네요.
그러나 같은 소속사의 올데이 프로젝트가 화제성의 큰 지분을 가져가버리고 YG의 베이비몬스터도 있는 상황에서 미야오는 고유의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현재 시점에서 미야오는 백화점 1층 쇼윈도우에 단독으로 진열되어 있는 반짝거리는 이름 모를 명품 가방 같은 느낌입니다. 지나갈 때 보이면 ‘와 예쁘다’하고 감탄하게 되고, 고급스럽고 아름답다는 건 전부 다 알고 있지만 막상 돈 주고 직접 구매하거나 신제품이 나오는 지 자세히 알아보고 싶을 만큼의 관심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고급화 전략이라면 본래의 목적을 잘 달성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대중들에게 더 확실히 각인되기 위해서는 명품 앰배서더나 테디 걸그룹 그 이상의 임팩트가 필요한데 아직은 어떠한 방향성으로 이것이 진행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음악적으로는 그들만의 영역이 있고 포텐도 충분한 상황에서, 적극적인 홍보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베이비몬스터 - WE GO UP
베이비몬스터는 이름에 걸맞게 베이비 같은 얼굴과 몬스터 같은 실력이 독보적인 그룹입니다. YG가 아무리 감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실력 있는 예쁜 사람들을 골라내는 눈은 어디 안 가는 것 같습니다.
WE GO UP은 브라스 소리와 베이스 소리가 돋보이는 힙합 장르의 노래입니다. 그 동안 베이비몬스터의 노래들은 강렬한 반주를 여러 겹 쌓기보다는 보컬로 승부하는 편이었는데 탄탄한 MR을 쌓았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취향입니다. 또한 보컬이 거의 없이 빡센 랩으로 벌스의 대부분을 채웠습니다. 그 동안은 고음에서 압도적인 실력과 에너지를 보여주는 아현이라는 보컬을 필두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고음만 계속하다 보면 목이 상하기 마련이고 YG 걸그룹으로써 제대로 된 힙합도 말아주는 것이 대중들과 팬들 모두가 원하는 수요이기 때문에 잘 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카와 아사의 랩 스타일과 플로우가 정반대이기에 곡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칵테일 중 하나인 네그로니가 떠오르는데요. 네그로니는 캄파리의 허브향 같은 쓴 맛과 스윗 베르무트의 달달한 맛의 선명한 대비로 두 배로 강하게 혀를 자극하는 듯한 맛이 좋은 칵테일입니다. 묵직한 저음으로 박자를 잘 타는 루카의 감각적인 랩에 이어 하이톤으로 타이트하게 빡센 랩을 귀에 박아주는 아사가 정말 좋습니다. 이 둘을 한 그룹에 모아놓은 게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지네요.
베몬도 나름 보컬의 큰 지분을 차지한 라미가 오랜 기간 활동 중지를 하면서 저음 영역대의 개성있는 보컬이 사라진 점은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 쪽은 멤버들이 전부 실력자라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쪽도 역시 코러스 멜로디가 나름 캐치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결정타가 없는 느낌인 것이 좀 아쉽습니다. 노래, 춤, 외모 모든 방면에서 육각형의 고점을 뚫어냈지만 대중들을 향한 강력한 호소력 한 방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베이비몬스터는 퍼포먼스형 걸그룹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될 정도로 무대 매너도 좋고 빅뱅/2NE1 등을 좋아하던 YG 코어팬들의 팬덤을 어느 정도 흡수해 왔기에,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앞으로 더 좋은 노래와 화제성의 흐름을 탔을 때 이들을 지탱해줄 수 있는 코어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점점 겹겹이 쌓이며 단단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즈나 - Mamma Mia
9월 30일 발매이긴 하지만 대충 10월 신보로 넣도록 하겠습니다.
이즈나는 아이돌 따위는 부르지 않기로 유명한 포스텍-카이스트 학생대제전에 올해 초청된 게스트였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대표곡을 말할 수 있는 1군 그룹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아이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름 인지도가 있는 그룹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타이틀곡 Mamma Mia는 래칫 장르의 미니멀한 비트에 강렬한 퍼포먼스가 특징입니다. 방지민을 센터로 하여 마이, 코코와 같은 트렌디한 수요상의 뛰어난 댄스 라인을 보유하고 있는 이즈나이기에 퍼포먼스는 정말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앨범의 수록곡과 이즈나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Racecar과 같은 몽환적이면서도 청량하고 시크하고 트렌디한 이즈나의 노래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이즈나는 테디한테 곡을 받아서 활동하는 그룹인데 테디가 또 이 장르를 정말 잘하죠. 테디야 뭐 이미 믿고 듣는 케이팝 그 자체, YG스러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니 말해 뭐해겠지만, 블랙핑크의 Forever Young, Don’t Know What To Do, Lovesick Girls / 2NE1의 Come Back Home, Lonely와 같은 노래를 들 수 있겠습니다. 해당 장르를 부르는 공식적이고 전문적인 명칭이 있을 법도 하나, 저는 미디어나 음악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고 대충 아련시크청량으로 이름 붙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즈나는 아이랜드2를 통해 결성된 서바이벌 그룹입니다. 서바이벌 그룹은 팬 참여 투표로 결정해서 만들어지기에 보컬라인이나 댄스라인에 대한 밸런스를 따로 맞춰내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다만 비주얼합은 정말 뛰어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방지민을 센터로 했을 때 시크한 컨셉에서의 퍼포먼스 완성도가 확 올라감을 느낍니다.)
그래도 윤지윤은 오랜 더블랙 연습생으로써 테디의 아련시크청량 곡들과 보컬 컬러가 잘 맞아서, 최정은이라는 호소력 있는 쨍한 컬러의 보컬과 합쳐져서 이 듀오가 고음으로 곡을 탄탄하게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윤지윤의 탈퇴는 다소 아쉬운 감이 있으며, 최정은의 부담이 좀 커진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유사랑 같은 올라운더는 지금도 보컬이 꽤 안정적이고, 방지민도 낮은 음역대의 허스키한 톤이 매력적이며, 다른 멤버들도 나이가 어린 만큼 제대로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면 더 발전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장르 얘기로 돌아가 보자면 이즈나의 정체성은 아련시크청량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이것이 이즈나의 팀 컬러이자 차별화되는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유튜브나 SNS 상의 댓글을 보면 해당 컨셉을 했을 때 확실한 반응이 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Not Just Pretty] 는 이즈나의 데뷔 앨범 이후 첫 EP입니다. 앞에서도 많이 이야기했지만 이 첫 EP가 아이돌의 포텐과 향후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아직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더 필요한 이즈나인데, 사인-삡-맘마미아 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것이 오히려 이들이 케이팝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서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마치 마카롱 맛집으로 인스타에서 소문난 카페를 찾아갔는데 만두마카롱김치찌개를 팔고 있어서 결국 아무것도 못 사고 돌아가는 느낌인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걸크러시는 올데프/미야오/베몬 등 YG/더블랙 계열의 그룹들이 많이 하고 있는데(물론 조금씩 다르지만), 꼭 이 시점에 파격적인 변신이 필요했을까요.
차라리 자가복제라고 욕을 먹어도 좋으니 TIMEBOMB - SIGN - Racecar로 이어지는 아련시크청량 계보를 타이틀로 밀어서 이즈나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이후에 맘마미아와 같은 멋있는 퍼포먼스형 걸크러시 곡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같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더블타이틀로 하고 적극적으로 바이럴을 하던가요.
여러모로 포텐이 상당히 높은 그룹이라고 생각하는데 안타까운 것입니다